Section 4.
어디까지 먹어봤니
북쪽에는 평양냉면,
남쪽에는 진주냉면
진주냉면 로드
냉면의 본고장, 진주
장유(張維)의 문집인 『계곡집(谿谷集)』 권 27에 <자장냉면(紫漿冷麪, 자줏빛 육수의 냉면)>이란 시가 실려 있다. 그중 냉면과 관련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줏빛 육수는 노을빛처럼 비치고 옥색의 가루가 눈꽃처럼 흩어진다. 젓가락을 입에 넣으니 그 맛이 입속에서 살아나고 옷을 더 입어야 할 정도로 그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뚫는다(紫漿霞色映 玉紛雪花勻 入箸香生齒 添衣冷徹身 客愁從此破).”라고 했다. 이후 『재물보(才物譜)』, 『진찬의궤(進饌儀軌)』, 『동국세시기』, 『규곤요람(閨壼要覽)』의 기록에도 냉면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이후에 북한 지역은 물론이고 당시의 한양에서도 유행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냉면(冷麵)은 삶은 국수를 차게 식힌 육수에 넣어 국수를 말아서 만든 전통적인 한국 음식이다. 냉면은 과거 음식물이 귀한 겨울철에 구황 작물인 감자와 메밀 등을 이용해 만들어 먹었던 데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력 11월에 즐겨 먹는 시절 음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한양대학교 고(故) 이성우 교수가 쓴 『한국의 조리문화사』에는 “옛날부터 찡하다는 표현의 평양냉면이 유명했지만 이 평양냉면에 견줄 만한 진주냉면은 남국의 맛으로 유명했다.”며 진주냉면의 명성을 전한다. 1800년 말에 진주목의 숙수(熟手,요리사) 한 분이 관영(官營)에서 나와 옥봉동 개울가에서 진주냉면을 뽑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양냉면이 메밀가루에 녹말을 섞어 만드는 반면에 진주냉면은 순전히 메밀만으로 만들고 돼지고기를 쓰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평양냉면은 육수를 소 사골과 양지육을 주재료로 하지만 진주냉면은 멸치, 바지락, 건홍합, 마른명태 등의 해산물에다 표고버섯을 넣어 만드는 것에 차이가 있다. 진주냉면은 쇠고기 장조림을 할 때 생기는 국물을 물과 섞어 메밀 국수를 말아 넣고 밤과 배를 채로 썰어 넣은 뒤에 갓 구운 낸 두부전을 얹어 먹는다. 진주냉면은 돼지고기나 쇠고기 그리고 얼음을 넣지 않은 점이 평양냉면과는 다르며, 반드시 해를 묵힌 간장으로 국물의 간을 맞추어 그 맛이 담백하고 시원했다고 한다.
냉면은 조선시대 권번(券番) 가에서 야식으로 즐겨 먹던 고급 음식이었다. 진주냉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는 쌀 6되는 가져와야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진주냉면은 주로 일본 관사와 주변 요정에서 성행했었는데 주 고객 역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중상류층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점차 대중적으로 확산했는데 왕과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도 냉면을 자주 먹었고 메밀면만을 따로 사서 먹거나 음식점에서 냉면을 팔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9년 실화를 바탕으로 쓴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 1권; 잃어버린 계절』의 한 대목이다. 그 옛날의 겨울밤은 더 길게 여겨졌을 것이다. 유난히 밤이 긴 어느 겨울밤 출출할 즈음에 떠오르는 야식의 문화가 있었다면 이런 장면이 아닐까? 진주냉면의 슴슴하면서 그 깊고 맑은 맛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1966년에 진주시 중앙시장에서 큰 화재 사고가 발생하면서 이어오던 진주냉면의 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후 유일하게 재개업한 곳이 ‘부산냉면’, 즉 현재의 ‘하연옥’이다.
한국전통음식문화연구원의 김영복 원장이 합작해 만든 KNN 다큐멘터리 <진주냉면, 2000년>이 되살려 낸 진주냉면의 복원과 재창조가 더해지면서 지금의 화려하고 푸짐한 진주냉면으로 변신을 꾀했다.
● 진주시 진주대로1317-20(본점)
● 진주시 남강로 673번길 7(촉석루점)
● 진주시 대신로 383(하대동점)
진주냉면을 대표하는 하연옥은 1년에 100만 명이 다녀가는 곳이다. ‘하연옥’의 육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 사골, 사태와 함께 홍합, 멸치, 밴댕이, 다시마, 바지락 등의 해물을 더해 2박 3일 동안 끓여 낸 육수에 400℃로 달군 무쇠를 넣어 멸치의 비린내를 없애고 보름 동안 저온 숙성 과정을 거쳐 맛을 북돋운다. 순 메밀과 고구마 전분을 물에 개어 뽑아 낸 면발 위에 무김치, 배, 외, 육전, 달걀, 실고추까지 고명으로 올라가고 육수를 부어 주면 물냉면 한 그릇이 완성된다. 매콤달콤한 양념에 고명을 섞어 소고기 육전과 함께 먹으면 미묘한 맛에 중독을 일으키게 된다. 식사를 주문하면 뜨끈한 선짓국이 빈속을 달래 주는데 냉면집에서 먹는 별미 중의 별미이다.
● 진주시 호탄길 34
진주의 황 씨 성을 가진 포수가 한겨울에 꿩 사냥을 나가 얻은 꿩으로 육수를 내어 냉면을 만들었다고 하여 황포수 냉면, 즉 ‘황포냉면’이라 칭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천연 재료로 깊은 맛을 내고 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내어 주는 구수한 육수가 속을 따뜻하게 데워 준다. ‘황포냉면’의 면발은 메밀 전분과 고구마 전분을 배합하여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다. 차진 면발에 육전과 오이, 진주 특산물인 배와 부드러운 달걀지단을 올리고 천연 재료로 우려낸 육수가 어우러지면 담백하고 감칠맛이 더욱 풍성해진다. 비빔냉면과 특미냉면에 올라가는 되직하고도 고소한 황태포 무침의 고소한 맛에 연이어 면발을 들어올리게 된다. 곁들이기 좋은 메뉴로 두툼하고 기름이 적은 육전과 만두도 빠질 수 없다.
● 진주시 정촌면 진주대로 66
진주냉면의 원형을 알고 있었던 하거홍, 황덕이 부부가 1945년 진주중앙시장에서 영업을 시작하며 진주냉면이 보존되었다. 이후 장남인 하연규, 박군자 부부가 가업을 이어 ‘박군자 진주냉면’으로 진주냉면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소뼈, 양지, 사태살을 넣고 12시간 이상 끓여 낸 육수를 사나흘 숙성한 뒤에 멸치, 밴댕이, 마른 새우, 황태 등의 마른 해산물과 바지락을 넣고 끓이는 과정에서 불에 달군 쇠봉을 넣어 특유의 잡내를 잡았기 때문에 깔끔하고 깊은 맛을 낸다. 지리산 자락에서 추수한 메밀에 전분을 섞어 쫄깃한 식감을 자랑하는 면 위에 두툼한 소고기 육전, 무김치, 오이, 배, 달걀 등 10여 가지의 다양한 고명을 수북하게 올려 완성한다.
● 진주시 모덕로 47번길 1-2
1992년에 진주시 상대동 공단 로터리에서 ‘조선면옥’으로 시작한 ‘송기원 진주냉면’은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인증한 백년가게이다. 국내산 한우 뼈를 고아 낸 진한 고기 육수와 남해 청정 지역에서 얻은 엄선한 해산물에 각종 한약재를 넣어 24시간 이상 한솥 끓여 낸 육수는 시원하고 청량감 있는 최적의 감칠맛을 낸다. 제주산 메밀을 볶아 풍미를 높이고 볶은 메밀가루는 끓는 물을 사용해 익반죽을 한다. 이후 숙성 과정을 거쳐 뽑아 내는데 쫄깃하고 부드럽게 입속에서 녹아나는 독보적인 식감의 메밀면에 노릇하게 잘 구운 돈 등심 육전, 달걀, 제주 월동 무김치, 나주 배, 그리고 새싹 산삼까지 화려한 고명이 포인트이다. 갈비탕과 육전도 유명하다.
● 진주시 금산면 금산로 62(본점)
● 진주시 도동천로157(시청점)
2021년에 제11회 한국문화예술대상 조리명장 대상을 수상한 진주교방음식 연구가 이종상 셰프가 운영하는 ‘진주냉면 산홍’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진주냉면 육수의 제조 방법을 소유하고 있으며 진주교방 음식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노력하는 곳이다. 비빔냉면에 얹어지는 붉은 양념장은 진주시에서 나는 각종 신선한 과일로 자연스러운 단맛을 낸다. 직접 담은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매일 아침에 갓 짜 낸 참기름만을 사용하는 것은 고명 하나도 허투루 얹을 수 없다는 이종상 셰프의 뜻이다. 이종상 셰프가 개발한 ‘산더미 물갈비’는 지리산 인근 농가와 진주 지역의 생산 농가와 함께 만든 메뉴이며 지리산 상황버섯, 노루궁둥이 버섯 등의 귀한 버섯과 지역에서 나는 신선한 채소가 푸짐하게 들어간다.
● 진주시 금산면 금산로 296-3
‘진주냉면 용아’는 조리명인이자 교방냉면 지도명인인 음식 연구가가 운영하고 있다. 물냉면과 비빔냉면, 그리고 물냉면과 비빔냉면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고민될 때 먹는 섞음냉면까지 깊은 맛이 난다. 산나물과 열무김치, 샐러드, 우엉조림 등 함께 나오는 밑반찬도 정갈하고 깔끔하다. 육회가 들어간 진주비빔밥과 속이 뜨끈해지는 갈비탕, 국내산 재료들로 만드는 메밀들깨칼국수도 인기 메뉴이다.
● 진주시 촉석루 226번길 11
진주시 토박이들이 많이 찾는 냉면 맛집이다. 모든 재료를 국내산으로 사용하며 소고기 대신에 돼지 등심을 쓰는 육전은 잡내가 나지 않는다. 메밀면을 직접 뽑아 내는데 도톰하고 탱글탱글한 면발에 육전과 배, 오이, 무절임, 달걀, 달걀지단이 올라간다. 과일을 넣어 매콤달콤한 맛이 나는 양념이 올라간 비빔냉면은 잃어버린 입맛을 돋우기에 제격이다.
● 진주시 가호로 76
깊은 육향의 소고기 육수와 시원하고 깔끔한 해물 육수가 어우러져 품격 있는 진하고 담백한 육수와 쫄깃한 면의 합이 더할 나위 없는 맛을 낸다. 물냉면을 젓가락으로 집은 뒤에 자꾸 손이 가는 소고기 육전 한 점을 올려 한입에 오물거리면 진주냉면의 참맛이 느껴진다. ‘참진주’라는 상호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다. 소박하지만 편안하고 정갈하게 진주냉면을 맛볼 수 있는 현지인들의 맛집이다.
이한치한(以寒治寒), 즉 ‘추위는 추위로 다스리자’는 조상의 지혜처럼 드디어 냉면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 계절인 겨울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번 주말에는 소중한 사람의 손을 잡고 근처 냉면집으로 나들이해 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