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04 2024 Spring
진주를 탐하다
월아산에 머물며 자비를 건네는 곳, 청곡사
알고 나면 이전과 같지 않은 것들이 있다.
경상국립대학교 건축학과 고영훈 명예교수의 눈을 빌어 청곡사를 살펴보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될 것이다.
깊고 푸른 월아산 속에 나지막이 자리 잡은 천년고찰
깊고 푸른 월아산 속 나지막한 터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청곡사로 향한다. 월아산에서 내려온 두 개의 물줄기는 천년 세월을 떠받들고, 고고히 내려앉은 두 마리의 청학은 호젓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청곡사 나무 기둥과 유물들이 진주시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따스한 햇볕을 좇아 봄이 오던 어느 날, 유장한 역사를 따라 거니는 동안에 청곡사는 어느새 잊지 못할 이름이 되었다.
청학이 품은 전설
문헌에 따르면 청곡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도선국사가 진주를 지날 때 남강 변에서 날아온 푸른 학이 월아산으로 날아와 앉았는데 성스러운 기운이 가득한 것을 보고 이곳에 절터를 잡았다고 한다.
청곡사는 임진왜란과 6·25전쟁을 겪는 동안 옛 모습이 소실되는 고비를 겪었지만 대대적인 중건 이후 잘 보존한 덕분에 지금도 위풍당당하다.
“청곡사 터는 두 줄기 물길이 한 곳에서 만나 이룬 못 위에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에요. 도선국사가 창건한 다음 1930년에 손질하고 고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왕후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왕비의 후원을 받아 세력이 커지다가 임진왜란 시기에 절이 전부 불에 타 버렸습니다. 이후 전란이 지나간 뒤인 1609년에 계행 스님과 극면 스님이 절을 다시 세웠고 조선 말기에는 포우대사가 크게 손질하고 수선했다고 합니다. 그다음에 한국전쟁 전란 시기에 거의 불에 탔지만 근래에 전 주지였던 서강 스님이 지금 모습으로 다시 중수했습니다.”
푸른 물결의 고요한 정취
청곡사에 오르는 길에 키가 큰 고목들이 지키는 ‘학영지’를 만났다.
학영(鶴影)이라는 이름부터 학의 그림자라는 뜻이니, 전설이 일군 자연경관이다. 두 물줄기가 모인 학영지를 두고 양옆으로 길이 나뉘어 저마다 풍경이 다르니, 원하는 쪽을 선택해 걷는다.
일주문을 지나 학이 찾아온 다리인 방학교(訪鶴橋)를 건너면 고목이 굳건히 서 있다. 봄을 기다리는 나무 아래에서 학영지를 굽어보니 속세에서 벗어나 별세계에 와 있는 듯하다. 못을 둘러싼 산줄기와 윤슬로 반짝거리는 푸른 물결. 퇴계 이황은 청곡사를 지날 때 세상을 떠난 셋째 형을 그리워하며 시를 남겼다.
긴역사, 긴 걸음으로
다시 보기
그리운 이가 저절로 생각나는 청곡사에는 대웅전과 업경전, 산신각, 요사채, 범종루 등이 단정하게 모여 있다. 학이 날아와 앉던 환학루 아래 통로는 좁고 나직하다. 허리를 굽혀 돌계단을 밟고 오르면 대웅전 앞에 서게 된다. 낮춘 몸으로 돌계단 끝에서 대웅전을 감상했다. 대부분 대웅전 앞에는 탑이 놓여 있지만 청곡사 대웅전 앞마당은 건물로 둘러싸여 ‘ㅁ’ 자 모양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고영훈 명예교수는 청곡사 대웅전에서 도편수의 뛰어난 수법이 돋보인다고 말한다.
다포계 건물
청곡사 대웅전은 앞면 세 칸에 옆면 두 칸의 다포계 건물이에요. 다포계 건물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놓입니다.
기둥 위에 놓이는 공포를 주상포, 기둥 사이에 놓이는 공포를 공간포라고 해요. 청곡사 대웅전은 실제 공포가 놓인 간격이 다르지만
앞면 각 주칸에 공간포를 2구씩 놓아 겉보기에는 간격이 같아 보이게 했습니다. 가운데 칸이 작으면 앞면이 초라한 느낌이 들고,
차이가 큰 경우에는 조화롭지 않은 느낌을 주는데 청곡사 대웅전 포벽은 간격을 모두 같도록 처리해서 조화롭죠.
도편수가 처음부터 이렇게 설계한 것입니다.
사찰에 깃든 옛사람의 마음
날렵한 지붕 아래 화려한 비단 무늬 단청은 세월이 흘러 바랬지만 여전히 굳건하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끝에 오롯이 서서 월아산에 안긴 청곡사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청학이 쉬어가는 듯한 순한 봄바람이 이마를 쓰다듬는 것처럼 스쳐 멀리 달아난다. 대웅전에 들어서기 위해 겸허하게 걸어 올라가면 순례자인 양 감탄이 쏟아진다. 숱한 사연과 역사가 얽혀 있듯 대웅전에는 국보와 보물, 문화재가 여럿이다.
청곡사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청곡사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 안식을 건넨다.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뒤에 설치된 벽에는 건장한 체구와 부드러운 이목구비의 얼굴 그리고 보색의 대비 등에서 화려함이 돋보이는 탱화가 걸려 있다. 부처님 아래 조용히 엎드려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 이 땅의 어지러운 역사를 모두 지켜 본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불도를 이루기를 바라며 자비롭고 온화한 미소를 묵묵히 보내고 있다.
석가모니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측에 지혜를 의미하는 문수보살 좌상,
우측에 지혜의 실천을 의미하는 보현보살좌상을 모셨어요.
석가모니불좌상은 신체 비례가 알맞고 자세가 안정감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의 불상으로는
대작에 속하고 불단의 천장에서 내려온 기둥에 낙양 장식이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계신 수미산 정상, 도리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국내 유일 목조각상, 청곡사 제석천왕, 대범천왕
제석천왕, 대범천왕을 목조각상으로 조성한 사찰은 국내에서 청곡사가 유일하다. 자비로운 모습의 얼굴에 아름다운 채색, 봉황으로 장식한 머리의 관, 옷의 무늬 등 다른 것에서 찾아볼 수 없는 양식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용이 장식된 의자에 앉아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생동감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시선을 옮기기가 힘들다.
세간의 모든 번뇌 다 벗어나고
오직 결정심만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소원이 이루어지는 곳
대웅전을 지키는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과 대범천왕, 제석천왕만이 보물이 아니다. 대웅전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업경전에 봉안된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그리고 금강역사상도 보물로 지정되었다. 업경전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을 훑어보았다. 소박한 외관과는 달리 화려한 문양과 사실적으로 조각된 명부시왕, 금강역사상 등의 목조각상이 가득하다.
일주문을 지나 학이 찾아온 다리인 방학교(訪鶴橋)를 건너면 고목이 굳건히 서 있다. 봄을 기다리는 나무 아래에서 학영지를 굽어보니 속세에서 벗어나 별세계에 와 있는 듯하다. 못을 둘러싼 산줄기와 윤슬로 반짝거리는 푸른 물결. 퇴계 이황은 청곡사를 지날 때 세상을 떠난 셋째 형을 그리워하며 시를 남겼다.
법당 밖으로 나온 큰 불화
성스러운 의식 공간임을 알리기 위해 하늘을 향해 펼쳐진 괘불은 세상 모든 이들의 소원에 귀 기울인다. 괘불 아래에서 사람들은 마음을 풀어놓고 세상과 화해를 청한다. 청곡사의 괘불은 왕과 왕비, 세자 등의 수명이 무량하기를 기원하며 조성되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신도들이 많지 않았던 탓에 불화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불화는 상상에 의해 그려지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고 화승들에게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의 방법이었으며 공동의 작업이었다. 청곡사 괘불은 131명이 시주로 만들어졌다. 불화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물품과 재원을 마련하기까지는 5개월이 걸렸다. 1721년 10월부터 가을과 겨울 두 계절 동안 넓은 천과 종이, 채색 안료, 쌀과 된장, 소금 등이 모였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화승 의겸을 비롯한 열 명의 승려가 괘불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탱화 자세히 보기
“해탈하는 경우 몇 가지 특징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어깨까지 내려온 긴 귀로 대중이 겪는 고통에 귀 기울여 듣고, 정수리에는 살이 볼록하게 솟아 있는데 이를 육계라고 합니다. 수행의 결과인 셈이에요. 미간에 솟은 하얀 털은 흰 눈빛과 같다고 해서 동그랗게 표현했습니다.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이 손을 내리면 팔 길이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다고 했는데 경전의 말과 같습니다. 지금은 문화재 손상이 우려되어 해인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에요.”
열여덟 폭 삼베에
그려진 불화
야외에 걸리는 괘불은 종이가 아니라 천에 그려진다. 청곡사 괘불은 37cm 정도의 삼베 열여덟 폭을 바느질해 연결한 길이 10m, 폭 6m가 넘는 넓은 바탕에 그려졌다. 괘불의 무게만 해도 114㎏에 달한다. 나무를 다루는 장인은 괘불을 담기 위해 곧게 자란 좋은 소나무를 건조하여 괘불함을 만들었는데, 괘불함 무게까지 더하면 230㎏에 달한다.
“건축은 비바람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피난처에서 출발했지만
거기에서 나아가 인간의 삶, 즉 기쁨이나 슬픔, 희망, 소망, 집단의 기억 등이
복잡하게 얽혀 담긴 그릇이 되었다.”
– 고영훈, <진주의 옛 건축> 중에서
천년고찰 청곡사에서는 오늘도 삼층석탑이 고즈넉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긴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킨 월아산 아래 홀로 선 삼층석탑 앞으로 청곡사의 세월이 밀려든다.
이곳에 닿았을 청학은 여전히 진주시 사람들의 소원과 바람을 둥글게 품고 있다.
“학이 알을 깨고 나와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학의 목에 고리를 채워놓았다는 뜻에서
탑에 원형 고리와 둥근 기둥을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다 깨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학의 먹이가 바닥나지 않도록 앞산 노적봉에 맞추어 탑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풍수를 배우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도선국사가 명당임을 알아보고 터를 잡은 청곡사.
월아산에 둘러싸여 있어 더욱 아늑한 이 공간은 진주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계곡물이 청량하게 흐르는 청곡사는 사람들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넉넉하게 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잊히지 않을 이름, 청곡사. 그리고 진주가 될 것이다.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월아산로1440번길 138 청곡사
문의
055-762-9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