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말하다 – 함께 잇다, 의암별제

Vol.05 2024 Summer

진주를 말하다

함께 잇다, 의암별제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안다고 해서 ‘온고지신’이라 한다.
19세기 말 제례 모습을 충실히 재현하며 ‘온고’하고
국가무형유산 등록으로 ‘지신’하는 의암별제의 단단하고도 위대한 내력은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진주성을 문화로 채워 역사를 새로 쓰다

진주시의 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축제가 있다. 매년 5월에 진주성과 남강 일원에서 펼쳐지는 진주논개제이다. 이 축제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순국한 논개와 민·관·군의 충절을 기리고자 시작되었으며, 진주성을 문화로 채워 역사를 새로 쓰고자 발전했다. 진주시가 교방 문화의 도시임을 목도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려는 이들의 교감은 묘한 울림을 안긴다.

조선 후기에 탄생한
의암별제

조선 후기에 탄생한 의암별제는 종묘제례와 문묘제례에 버금가는 종합 가무 제례이다. 왜장에 저항한 논개를 기리는 제사인 까닭에 일제 강점기에는 잠시 명맥이 끊겼던 의암별제는, 1992년 한 여성이 기적적으로 복원에 나섰다. 그의 이름은 성계옥. 진주검무 예능 보유자(인간문화재)였던 인물이다.
그가 수장을 맡았던 ㈔진주민속예술보존회는 오늘날까지 의암별제를 계승, 전수하고 있다.
이렇게 부활한 의암별제는 진주탈춤한마당과 함께 2002년 진주논개제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104명 무용수의
손끝에서 살아나는 예술

2024년 5월 3일, 옛것이라는 알을 깨고 나온 진주논개제가 시작됐다. 의암별제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교방예술단체, 104명의 여성 무용수가 양손에 칼을 치켜든 채 진주성에 서 있었다. 무용수들의 눈빛에서 어제를 통해 오늘을 아로새기려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복원 후 올해로 33회째를 맞은 의암별제는 예년과는 조금 다른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 중심에는 ㈔진주민속예술보존회의 수장이자 진주검무 예능 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는 유영희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이 있다.
그는 성계옥 선생의 수제자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조언자이자 조력자였다.

꿋꿋하게 이어온 축제, 진주논개제 그리고 의암별제

진주논개제 #의암별제 #진주검무 #교방가요 #진주

1992년에 의암별제를 처음으로 복원해 선보였을 때는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진주시가 떠들썩했어요.
“이렇게 좋은 축제가 있었는지 몰랐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감탄했는데 당시는 요즘과 달리 보수적인 풍조가 있었어요.
여자들이 의식을 주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우리는 교인인데 제사에 왜 참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다양한 반발이 터져 나왔지요. 이러한 분위기 탓에 지방자치단체도 별로 관심이 없었고,
참으로 외로운 시절이었지만 꿋꿋하게 버티면서 10년을 이어왔어요. 이후 2002년에 진주논개제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축제의
일환으로 의암별제를 개최하게 되었어요.

복원이 아닌 의암별제의 진정한 첫 시작은 1868년으로 그 몇 해 전에는 진주에서 발생한 진주농민항쟁 등이 있어 민과 관이 부딪치며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던 시기였다. 진주목사 정현석은 민과 관이 어우러져 화합하는 방안을 고민하던 중에 논개의 사당에서 제향을 올리는 특별한 제사인 의암별제가 시행되도록 지원했다.

의암별제는 진주교방 기녀들이 주축이 되어 고관대작과 전국의 기녀들이 방문해 대금, 검무, 가야금 등 음악[樂], 노래[歌], 무용[舞]으로 교류했고, 평민이나 천민 등의 방문객에게도 비빔밥을 대접하며 구휼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하지만 화려했던 의암별제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의암별제 복원의 실마리가 보인 것은 관심을 가진 어느 대학 교수가 성계옥 선생에게 정현석 목사가 집필한 『교방가요』라는 문헌에 교방 문화가 상세히 서술되어 있음을 알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정현석 목사가 집필한 『교방가요』

성계옥 선생님께서 『교방가요』를 읽어보려고 백방으로 찾아본 결과 개인적으로 구할 수가
없었어요. 서울시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방법밖에 없어 직접 찾아갔지요.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온 ‘논개 제사를 3일 낮과 밤으로 지냈는데 이를 위해 기녀들이 300명씩 모이고
어마어마한 규모였다.’라는 이야기가 실제로 문헌상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문헌이 전부 한문으로 집필되어 있었고 해석본이 나와 있지도 않았어요. 성 선생님은 뛰어난 한학자였으므로 이를 계기로
『교방가요』를 직접 해석해 보기로 마음먹었지요. 더욱 세밀하게 해석하기 위해 고려대학교 한문학과에 진학해 한문을 공부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임하셨어요. 그 기간에 꾸준히 도서관에 들러 『교방가요』를 필사했어요. 그렇게 『교방가요』를 해석한 결과
제사를 어떻게 지냈는지 아주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답니다.

『교방가요』에서 정현석 목사가 의암별제에 대해 언급한 부분

내가 진주에 부임한 다음 해에 병마절도사와 의논하여 의기사를 중건하고
아울러 의암별제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월 중에 택일하여 제사를 지내되,
제관은 진주 기생 중에서 뽑아 제례의식 절차를 예습시켜
의식에 실례가 없도록 하여 해마다 상제를 지내도록 하였더니

– 성계옥, 『진주의암별제지』 (진주:진주민속예술보존회, 1987), 29쪽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선호하는 흐름 속에서
제례무가 할 일은 무엇인지 고민하다

성계옥 선생은 본인이 작업한 『교방가요』의 해석본을 토대로 논개를 기리는 풍류 제례와 의암별제를 복원했다.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은 일부 항목은 새롭게 채워 넣었다. 보법이 나와 있지 않았던 제례무를 새롭게 고안하고, 복식에는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했다. 제례무에 나서는 무용수에게 당의를 입히고 한삼을 끼도록 한 것을 일컬어 기녀와는 맞지 않는 옷차림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사당을 만들어 모시는 여성은 논개가 유일무이한 만큼 후손으로서 그를 더 높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유영희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은 신분을 떠나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일어섰던 이름 모를 이들을 추모하고, 진주가 가진 교방문화의 저력을 펼쳐 보이고자 조용히 사투를 펼쳐 왔다.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선호하는 흐름 속에서 제례무가 할 일은 무엇인지 한동안 치열하게 고민해야 했다. 그때 다가온 것이 ‘복식’이었다.

㈔진주민속예술보존회와 지역 사회가 함께 수년째 공들여 온 의암별제 국가무형유산(무형문화재) 등록을
이끌어내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동안 국가무형유산 등록을 위해서는 복식의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기 때문에 대의를 위해 복식 변경을 선택했습니다.

그리하여 30년 넘게 이어져 온 의암별제는 올해 들어 몇 가지 변화를 맞았다. 무용수들은 당의 대신에 노란색 저고리를 입었고,
손에서는 더 이상 한삼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유영희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은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귀띔했다.

그거 아셨어요? 이번 의암별제에서 제례무 복식과 함께 병풍도 새롭게 교체했어요. 의암별제의 성격과 맞지 않았던
화조도 대신에 부와 장수의 뜻이 담긴 우촌 최태문 화백의 목단 꽃 병풍으로 바꾸었답니다. 또 의암별제에 영어를
구사하는 사회자를 투입했어요. 제례 순서를 영어로 해설해 축제 현장을 지나는 외국인이 한 사람이라도 더 눈여겨볼 수
있도록 지원했죠.

그의 마음 한편에는 진주에 대한 애착이 단단히 자리잡힌 듯했다.

전국에서 유일 여성 제례 의암별제,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길

유영희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이 의암별제를 대하는 진심은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마음에서도 드러난다. “제례에서 극소수 직책을 제외하고 모든 자리에 지역 주민을 교육한 뒤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다 함께 어우러져야 축제가 되니까요. 우리 보존회 구성원만 참가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지역 주민이 직접 참여해 보아야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알게 되고, 몸소 경험한 뒤에는 진주시에 이러한 문화가 있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제례무에 교육을 받은 일반인을 투입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의 일이다. 유영희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은 “진주검무는 춤이 어려운 탓에 속성으로 배워 추기가 힘들지만 제례무는 일반인도 쉽게 익힐 수 있다.”라고 하며 “이미 쉬운 제례무를 더 쉽게 개량해 내년에는 더 많은 지역 주민을 교육한 다음 무대에 내보내고 싶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내일을 그려가는 자리로,
함께 잇는 의암별제

의암별제를 국가무형유산으로 등재시키는 것은 물론,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내일을 그려내는 자리로 거듭나도록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설 예정이다.
의암별제의 맥을 잇는 동시에 오늘의 의암별제를 알리는 데 앞장서는 ‘에나’ 예술이 그를 매 순간 온 마음을 다해 살아가도록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