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말하다 – 오성다도원

Vol.07 2024 Winter

진주를 말하다

한국 차인회의 근원, 진주

| 글 | 정현정

한국에 최초로 차인회가 생긴 건 1969년, 비봉루에서 결성된 ‘진주차례회’였다.
‘차의 날’을 선포하며 한국 차 문화 운동을 시작한 진주 곳곳에는, 차인들이 걸어온 수많은 시간이 엿보인다.
‘차茶’로 화합하며 이뤄내는 다양한 파장을 기대하며 진주의 차인들은 발맞추어 걸어가고 있다.

진주고등학교와 진주여자고등학교 사이로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이

서 있다.
봉황거리를 마주 보고 오른편에 비봉루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폭을 가진 오롯한 길에 들어서니 무성한 녹음 아래 비봉루가 진주를 굽어보고 있다.
진주의 아름다운 진면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비봉루에서
사단법인 아인 박종한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박군자 한국오성다도연구원장, 심재원 한중차문화연구회 회장
(한국차문화연구원 부원장 겸 월인천강 대표), 노영주 진주차인회 회장이 전국차인회의 출발점이 된 ‘진주차인회’의 내력을 펼쳤다.

# 비봉루

비봉루비飛鳳樓 /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현재 비봉루는 정몽주의 후손인 정상진이 1939년부터 2년간의 공사 끝에 건립했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에 겹처마 팔작八作지붕을 올린 화려한 누각이다. 특히 단청이 화려한데, 단청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정교한 ‘갖은금단청’으로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

* 갖은 금단청 : 부재의 양 끝머리에 단청머리초를 그리고 그 중간에 화려한 금무늬를 놓고 색을 칠한 단청


비봉루 내부의 동서남북 사면에는 한국과 중국의 고사故事가 그려져 있다.
누각 안에는 오천烏川 정의열鄭義烈의「비봉루 중건기飛鳳樓 重建記」와 문소聞韶 김황金榥의「비봉루 상량문飛鳳樓 上樑文」현판이 걸려 있으며, 「비봉루飛鳳樓」라는 편액은 추사체의 맥을 잇는 서예가 은초 정명수 선생이 썼다.


비봉루 동측에 위치한 관리사는 서실 겸 차실로 사용하고 있는데 역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사방에 계자난간이 둘러져 있고, 외부에 유리창이 부착되어 있으며 은초 정명수 선생의 서실로 운영하던 곳으로, 현재는 그의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1 비봉루는 진주차례회가
창립된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비봉루가 진주 차 문화에 얽힌 사연이 있나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각 고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사신들이 묵으면서 연회를 열기도 했던 객사가 있었습니다.
1374년(공민왕 23년) 포은 정몽주 선생은 경상도 안렴사(고려 시대 도의 장관)로 진주를 방문해
진주 객사에 있던 비봉루에서 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飛鳳山前飛鳳樓
비봉산 앞에는 비봉루 우뚝하고


樓中宿客夢悠悠
누각에 잠든 객 한가로이 꿈을 꾸네


地靈人傑姜河鄭
지세 좋고 인물 걸출하니 강‧하‧정씨라.


名與長江萬古流
그 명성 긴 강과 같이 영원히 흘러가리




– 포은 정몽주의 시

포은 정몽주 선생의 17대손인 봉은 정상진 유지는
현재 비봉산 비탈에 비봉루를 새로 세우면서 이 시를 주련으로 내걸었습니다.
또 편액은 건립자의 장자이자 당대 대서예가 은초 정명수 선생이 직접 쓴 것이지요.
비봉루의 건물 구조와 단청 그리고 배치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를 내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당시 비봉루의 단청이 너무 아름다워 주위에서 ‘꽃집’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 현대사 최초의 차회, 진주차례회
한국차인회로

1969년 10월 1일 비봉루에서 효당 최범술, 아인 박종한, 태정 김창문, 유당 정현복, 우남 문후근, 아천 최재호, 은초 정명수, 차농 김재생, 경해 강명찬, 무전 최규진 등의 차인들이 모여 한국 현대사 최초의 차회인 ‘진주차례회’를 발족했다. 이는 현대 차 문화 단체의 효시가 되었다. 1977년 ‘진주차례회’는 ‘진주차도회’로, 1979년에는 ‘진주차인회’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1977년 1월에는 ‘한국차도회’가 발족되었고 ‘차 문화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78년 8월에는 사단법인 ‘한국차인회’가 창립되었고 아인 박종한 선생이 부회장을 맡아 수고했다.

– 왼쪽부터 아인 박종한, 의재 허백련, 효당 최범술, 차농 김재생.

2 진주차례회를 창립할 당시 진주에는
하동이나 전라남도 보성과 같은 대단위 녹차 밭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차를 재배하지 않는 지역임에도
진주에서 열 분이 뜻을 함께 하여 차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모이게 되었나요?

은초 정명수 선생이 계셨던 비봉루는 문화 사랑방이었습니다.
진주뿐만 아니라 전국의 문화계와 예술계 인사들이 비봉루를 찾아왔어요.
진주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시를 지어 낭송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추기도 하며 종합 예술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은 문인과 예술인들이 차담을 나누며 교류하는 차실의 역할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차 모임이 형성되면서 교육자와 예술가 그리고 기업인으로 구성된
‘진주차례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찻자리가 펼쳐지는 곳
문화사랑방, 비봉루

하동과 산청에서 차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진주는 찻잎을 판매하기에 가장 가까운 대도시로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특히, 진주에서 비봉루는 날마다 찻자리가 펼쳐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농사지은 차를 한 짐 지고 와서 내려놓고 가셨습니다.
덕분에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누각 위에 올라서 차를 마셨습니다.
박노정 선생도 유년 시절에 ‘비봉산과 비봉루에는 언제나 은초 할아버지가 계셔서 좋았다’고 하셨지요.

3 매년 5월 25일은 ‘차의 날’입니다.
이는 1981년 진주 촉석루에서 아인 박종한 선생이
‘차의 날 제정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기념일입니다.
‘차의 날’을 5월 25일로 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입춘에서 100일째 되는 5월 25일을 차의 날로 제정했는데 그즈음은 햇차가 나오는 시기입니다.
입춘에 차나무가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100일 때 새싹을 맺게 되는 축복을 받는 날이지요.
마치 백일을 맞는 아기의 백일잔치와 같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날은 차인들이 모두 모여 햇차를 내려 준 옛 선현과 하늘에 감사를 드립니다.

허물어져 가는 예절을 바로 세우고
혼미해 가는 마음을 사색으로 바로잡고
삭막한 정서를 멋의 향기로 순화하여
쪼들리는 가난을 윤택한 살림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가 다 바라는 바이다.

오늘 이 차의 날을 기하여
우리 국민이 우리 차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찬란하였던 민족의 차문화가 재조명되어
다시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되고
우리 것을 되찾아 나가는 참다운 우리의 길이 열려갈 것을 믿으면서
5월 25일을 차의 날로 제정, 선언하는 바이다.


– 1981년 5월 25일, <차의 날 제정 선언문> 중에서

진주에서 서울, 전국으로
차 문화를 전하다

1981년 5월 25일에는 촉석루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차의 날 제정 선포식’이 열렸다. 이후 각 학교에서 차 교육을 시행하도록 권장했고 상설 교육장에 교육 프로그램을 열어 공공기관이나 직장인을 대상으로 차도를 진행했다. 차의 날이 제정된 이후 차 문화에 대한 인식이 한층 높아졌다.

4 진주에는 50여 개의 차회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 진주의 차인들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진주차인회는 매년 ‘김대렴공(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신으로 당나라에서 차를 가져온 관리) 추모 행사’와
‘차의 날’을 기념하고 선고(先故) 차인들에게 헌공 차례를 올리고 있습니다.
또 다른 지역 차회와 교류를 맺어 활동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2년 전부터는 내적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어
진주차인회 회원들이 직접 책을 만들고 차 문화와 역사에 대한 공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0년에 ‘차 생활로 따뜻한 시민 사회를 열어간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진주의 13개 차회가 연합해서 차 단체인 ‘진주연합차인회’가 결성됐습니다.
그리고 ‘진주차식 전시회, 시민과 함께하는 찻자리’, ‘진주차식 경연 대회’와 같은
다양한 활동을 시행하면서 지역의 차 문화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5 진주 차인들은 오랜 차 생활을 했음에도
차 도구가 소박한 것이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경의잔’도 소박함이 돋보이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요?

아인 박종한 선생은 차인이면서 교육자였습니다.
1949년에 대아중학교와 대아고등학교를 건립하고 남명 조식 선생의 경의 사상을 교육에 접목해서 ‘오성다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차 생활을 통해 인성 교육을 강조한 것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생활 속에서 바로 실천하는 교육이었습니다.
그래서 찻잔에 ‘경敬’과 ‘의義’ 자를 새겨 넣어 차를 마실 때마다 경의 정신을 깨치고 닦도록 지도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경의 자세로 마음을 밝히고,
밖에서 행동할 때는 의를 바탕으로 실천하여 항상 배려하는 정을 표현한다는 의미입니다.

차를 마실 때는 ‘경敬’ 자를 상대방 쪽으로 놓아 공경의 의미를 보였고,
‘의義’ 자를 자신의 쪽으로 놓아 신의를 지킬 것을 다짐했습니다.

차를 마시는 것은 말로만 공경하고 의롭게 행동하라고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경과 의를 오감으로 인식해 정서가 안정되게 하기 위한 차법이었습니다.

6 차를 마실 때 지켜야 하는
예법이나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1966년 어느 봄날에 저의 시아버님이신 은초 선생께서 부르시더니 ‘너도 차 한 잔 마셔 보아라.’라고 하셨어요.
찻잔에 차를 따라 주셔서 첫 잔을 마셨더니 또 따르시고 이렇게 여러 번 차를 따라 주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이에 아버님께 차는 왜 여러 번 마셔야 하는지 여쭈었습니다.
아버님은 “첫 잔은 차의 색을 보는 것이고, 그다음 잔은 차의 맛을 보고, 마지막 잔은 차의 향을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적어도 석 잔은 마셔야 차를 마셨다고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단순히 차를 마시기보다는
마음을 갈고 닦아 상대방을 공경하는 마음과 신의를 지키겠다는 실천을 통해
인격적으로 성숙한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정신적인 수양과
실천을 지향하는
진주 차인들의 정신

진주가 가진 차 문화의 가치를 새로이 바라볼 수 있도록 2019년 ‘한국 차 문화 수도 진주’를 선포했다. 진주의 차인들은 전통 차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대중에게 알리고, 차를 통해 성찰하여 인격적으로 성숙한 생활을 실천할 수 있도록 차도 교육을 확산하는 데 노력했다. 또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찻집과 차회가 주최하는 차 문화 행사, 교류회, 차 의례 시연 등 크고 작은 행사를 이어 나가고t 있다. 현대 한국 차 문화의 발상지, 진주에서 한국 차 문화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방향이 기대되는 이유는 수양과 실천을 지향하는 차인들의 정신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 지수남명진취가

지수남명진취가(게스트하우스) 내에 다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7 차를 마시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우리 생활에서 어떤 자양분이 될까요?

초의선사는 ‘차는 혼자 마시면 신神이 되고,
두세 사람이 마시면 승勝이 되며, 서너 사람이 즐기면 취미趣가 되고,
일곱 사람 이상이 마시면 평범하다凡’고 했습니다.

다도는 여러 사람이 함께 차를 마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이라고 할 수 있지요.
불교에서는 사람들과 차를 나눠 마시는 것 또한 보시布施로 여겼습니다.

인향과 묵향이 켜켜이 쌓인 비봉루에서 시작된 차인회는 우리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차 문화의 꽃을 피워냈다.
오늘도 차의 향기는 진주 곳곳을 새롭고 따뜻하게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