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맛보다 – 진주육회비빔밥 천황식당

Vol.07 2024 Winter

진주를 맛보다

하얀 쌀밥 위에 피어난 진주 ‘꽃밥’

| 글 | 박보현

하얀 쌀밥 위에 오방색 나물을 조물조물 곱게 무쳐 올리고 육회를 얹으면 진주 ‘꽃밥’이 피어난다.

허수경 시인이 그리워한 진주 ‘꽃밥’

“진주에는 아주 맛난 음식이 많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가지 맛난 것. 진주 육회비빔밥. 그 밥을 진주 사람들은 ‘꽃밥’이라고 불렀다. 꽃밥 사이에서 우리는 마주 앉아 있었다.”
– 허수경 산문집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중에서

*허수경(1964-2018) 시인은 진주 태생으로 평생 독일에서 평생 우리말로 문학 활동을 하였다.


허 시인의 산문집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난다 출판사, 2018)에는 닿을 수 없는 고향에 대한 먹먹한 그리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중 하나는 중앙시장 안 모퉁이에 있는 가게에서 노모와 나누어 먹었던 꽃밥, 즉 진주 육회비빔밥에 얽힌 일화가 담겨 있다.

진주 육회비빔밥의 탄생

진주 육회비빔밥의 유래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중 진주성 전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진주강씨 강민첨 장군의 제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당시, 왜군과 대치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병사들의 보양을 위해 익히지 않은 육회를 올려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는 설과 예로부터 문묘나 서원에서 올리는 제사에는 혈식군자(血食君子)라 하여 날고기를 올리는 풍습이 있는데 진주 강씨 강민첨 장군의 제사에도 붉은 날고기를 올리는
‘혈식제사’를 지내던 가문의 풍습이 이어져 내려와 육회 비빔밥으로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진주비빔밥,
진주의 대표 음식이 되다

고종 3년(1896년) 진주가 경상남도청 소재지가 되었을 당시에 관찰사가 가장 즐기는 음식이 바로 ‘진주화반’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월간지《개벽》(1920년 6월 25일 창간)에 1925년에 발간된 ‘팔도 대표의 팔도 자랑’ 기사에서 진주비빔밥이 경상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소개될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또 1929년 12월에 발간된 잡지 <별건곤>에도 진주 지역의 명물로 진주 육회 비빔밥이 소개되어 있다.

새파란 채소 옆에는 고사리나물 또 옆에는 노르스름한 숙주나물 이러한 방법으로 가지각색의 나물을 둘러놓은 다음에…
(중략)
…육회를 곱게 썰어 놓고 입맛이 깔끔한 고추장을 조금 얹습니다.

진주 육회비빔밥은 동황색 놋그릇에 하얀 쌀밥을 담아 제철 나물 다섯 가지를 올린다. 이때 나물이 최대한 부드러워지도록 오랫동안 치대어 나물을 무쳐야 한다.
그 위에 묽은 엿고추장을 곁들인 뒤에 소고기 우둔살을 얇게 채를 썰어 깨소금, 마늘, 참기름 등으로 버무린 육회를 얹는다. 그 모양새가 마치 ‘꽃’처럼 보여 진주비빔밥을 ‘꽃밥’ 또는 ‘칠보화반’ 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른 홍합과 문어포를 푹 삶아 육수를 내는데 홍합은 건져 내어 잘게 다져서 우둔살과 다시 끓인 다음에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이를 ‘포탕’이라 일컫는다.
이 포탕을 밥 위에 제일 먼저 한 숟가락 얹는데 감칠맛을 내는 천연 조미료의 역할을 한다.

진주비빔밥에 육회만큼 빠질 수 없는 것이 소고기 선짓국이다. 소금으로 깨끗이 씻은 양, 천엽, 허파, 간 등을 넣어 오랫동안 푹 삶은 국물에 깍둑썰기한 선지와 도톰하게 썬 무, 콩나물, 대파 등을 함께 끓여서 준비한다. 이렇게 밑반찬과 함께 내놓으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진주비빔밥 한상차림이 완성된다.

1915년에 문을 연 ‘천황식당’

이렇게 오랜 역사를 통해 전해져온 육회비빔밥처럼 100년 넘게 한자리에서 대를 이어온 식당이 있다.
1915년에 문을 연 ‘천황(天凰)식당’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진주 육회비빔밥집

천황(天凰)식당은 1915년부터 현재 위치 (나무전거리)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4대를 이어 ‘진주 육회비빔밥’을 만들다

흔히들 오래된 식당을 ‘백년식당’이라 부르지만 실제로 100년 이상을 운영한 가게는 드물다. 그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천황식당은 외관부터 세월의 깊이가 묻어난다. 가게 입구에서 낯선 객을 반겨 주는 클래식한 자동차와 오래된 기와지붕, 그리고 손으로 쓴 나무 간판에는 흰색 바탕에 파란색 ‘천황식당’ 글자가 단정하게 적혀 있어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붙든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된다. 문에 힘을 주자, ‘끼이익’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것마저 정겹다.

가게 내부에 걸려 있는 영업신고증과 남강의 흑백 사진,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과 창문에는 지나간 세월이 고스란히 베어 있다. 가게 내부의 탁자만 대충 훑어보아도 그 세월을 짐작할 수 있듯 곳곳에 놓인 소품들도 고유의 자리를 지키며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오늘도 이 가게를 찾아오는 이들은 그 세월이 자아내는 따뜻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지도 모르겠다.

운명처럼 ‘밥집’을 열다

진주의 천석꾼이었던 ‘정염’ 할아버지와 ‘강문숙’ 할머니 부부는 당시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을 스무 명 넘게
둘 정도로 부족함 없이 살았으며 동네에서 인심 또한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남은 땔감 모두 드릴 테니 밥 좀 주이소.”

노부부는 나무전거리에 나무를 팔러오던 나무꾼들이 나무를 다 팔지 못하면 나뭇짐을 맡아 주기도 했다. 장이 파할 무렵이 되면 배고픈 나무꾼들이 식은 밥이라도 먹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강문숙 할머니는 이를 지나치지 않고 마치 귀한 손님을 맞이한 것처럼 정성껏 밥상을 내어 주었다.
손이 크고 음식 솜씨가 좋았던 강 할머니는 이후 나무전거리에서 ‘대방네’라는 식당을 차리고 백반 정식을 팔기 시작했다. 이후 식당 이름을 ‘천안식당’으로 바꿔 운영했으며, 아들인 2대 정봉문 대표는 명리학을 공부하던 중 진주에 봉황이 살았다는 전설에서 착안해 ‘하늘의 봉황’이라는 뜻을 담아 현재의 ‘천황식당’으로 상호를 바꾸어 달았다.

이 집만의 가보(家寶)
4대째 이어지는 장 담그는 전통

천황식당에서는 4대를 이어 온 된장, 간장, 고추장을 집안 비법으로 손수 담가 변하지 않는 맛을 유지하고 있다. ‘장맛’을 강조한 1대 강문숙 할머니의 정신을 그대로 잇고자 장을 삭히는 일련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후대까지도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마음과 조상의 지혜를 물려받겠다는 의지로 장맛을 지켜오고 있다.

천황식당 가게에 걸려 있는 ‘백년천마’ 글귀처럼 백 번 천 번 갈고 닦는다는 부단한 노력과 정성이야말로 오늘의 천황식당을 있게 한 것이리라.

# 백년천마

이렇듯 천황식당은 100년 이상의 세월 동안을 변함없이 진주 육회비빔밥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천황식당’에 흐르는 백년의 세월

100여 년 이상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천황식당의 내부 탁자에는 지난 세월의 숨결이 느껴진다.


1915년부터 장사를 시작한 천황식당은 현재까지도 온돌과 아궁이가 남아 있는 전통 한옥이다. 식당을 지으며 남은 나무로 실내에서 쓰는 탁자를 만들었기 때문인지 마치 그 시절에 멈추어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도 그럴 것이, 1950년 한국전쟁의 시련을 맞아 건물이 한 차례 무너졌다가 그 뼈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목조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1950년 6ㆍ25 전쟁 당시 진주에도 폭격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천황식당의 노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하던 ‘김상’ 아저씨는 혼자서라도 집을 지키겠노라 식당에 남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식당으로 돌아온 노부부는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현재 주방 굴뚝 밑) 끝까지 식당을 지키다 웅크린 채로 숨져 있는 김상 아저씨를 발견했다. 노부부의 후손들은 천황식당을 지켜 준 김상 아저씨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매년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현재까지 제사를 모시고 있다.

몸과 마음의 허기를 달래다

이즈음이 되면 쌀쌀한 찬 바람을 막으려고 옷깃을 자꾸 여미지만, 속이 찬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럴 때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캄캄한 새벽에 천황식당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한다.

천황식당은 1년 365일 새벽 시장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속을 데워 주기 위해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선지해장국’과 ‘콩나물국밥’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 뜨끈한 맛을 잊지 못해 사람들은 오늘도 여전히 ‘천황식당’을 찾아와 몸과 마음의 허기를 달랜다.

#화기만당

식당 내부에는 진주를 대표하는 선비 서예가 은초 정명수 선생이 직접 쓴 ‘和氣滿堂(화기만당)’ 글자가 액자로 걸려 있다. 비록 빛바랜 글귀지만 다채로운 빛깔의 육회비빔밥을 사이에 두고 서로 화합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길 염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