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탐하다 – 상무사

Vol.07 2024 Winter

진주를 탐하다

진주상무사의 역사
진주의 상업시장은 어떻게 변모했나

| 글 | 국립진주박물관 이효종 학예연구사

| 사진제공 | 국립진주박물관

2014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진주상공회의소가 국립진주박물관에 진주상무사 관련 자료를 기증했다.
진주 상인들이 남긴 기록을 따라 그들의 역사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물산의 집산지, 진주
행정·교통 중심지에서 상업 도시로

진주는 경남 서부지역의 으뜸 도시, 수부라고 일컫는다. 685년(신문왕 5) 청주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의 경남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큰 고을이 된 이후, 진주는 정치, 사회, 문화적 우위는 물론 경제적 측면에서도 늘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이는 남강 주변의 넓은 들판에 나오는 풍부한 농산물, 인접한 남해에서 잡히는 해산물, 그리고 지리산 일대에서 채취되는 임산물이 골고루 공급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주는 산청, 단성, 삼가, 의령, 함안, 고성, 사천, 곤양, 하동 등 경남 서부지역의 여러 고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역 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입지는 진주가 오랫동안 지역 내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진주의 시장은 단순히 한 고을의 시장이라기보다 경남 서부지역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활기찬 진주중앙시장의 현재 모습

#행정의 중심 #대사지 #진주성 북문 동쪽
#진주중앙시장의 기원

이러한 배경에는 진주라는 도시가 지닌 깊은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였던 진주는 전쟁 이후 경상우도의 방어를 책임지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상주하면서 군정을 관리하는 곳이었고, 진주목의 일반 행정까지 관장하는 고을이었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상주처인 진주성은 개축되어 성 주변의 해자인 대사지는 깊게 파졌다. 이때 진주시장은 객사 앞에서 진주성의 신북문으로 이르는 길을 따라 형성되었다.

1920년대 진주성에서 바라본 시가지

일제강점기 전후, 진주에 온 일본인들이 대사지를 매립하여 건물을 짓고 일본인의 거주지로 조성하면서 진주성과 진주목 관아 지역을 분리하던 대사지는 사라지고 두 공간은 하나로 합쳐졌다. 이런 변화 속에서 1920년대 경, 진주시장 또한 기존의 객사 앞에서 진주성 신북문으로 이어지던 시장에서 북문 동쪽 공터로 옮겨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진주중앙시장의 기원이다.

#진주시장 #어채시장 #우돈시장
#신탄시장 #나무시장

1940년대 진주에는 진주시장(현 진주중앙시장), 어채시장, 우돈시장, 신탄시장이 있었다. 진주시장은 미곡류, 포목류, 잡화류 등을 취급했다. 시장 규칙에 따라 공설시장으로 바뀌어 매일 장이 서는 상설시장과 매월 2일와 7일로 끝나는 날짜에 서는 정기시장이 함께 열렸다. 어채시장은 진주시장 인근에서 열리는 오일장으로, 지역에서 생산하는 싱싱한 제철 채소와 과일 등을 도소매로 판매했다. 삼천포와 남해, 하동 방면에서 유입된 해산물과 남강 인근의 민물 어류도 거래됐다. 우돈시장은 현 서부시장에 위치했는데, 비교적 큰 규모의 도살장도 있었다. 땔감과 신탄은 진주시장의 위쪽 현 장대동과 상봉동 부근에 일명 ‘나무시장’이 있었다.

보부상에서 근대 상인까지
기록으로 보는 진주상무사의 역사

상무사는 전국적인 보부상 단체로, 진주상무사란 ‘진주지역 상인들의 조직’을 뜻한다. 현재 경남의 진주, 고령, 창녕, 울산, 삼가와 충청도의 부여, 예산, 홍성 등에만 상무사 관련 자료가 남아 있으며, 이 자료들은 보부상 조직에서 출발해 근대 상인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조선 후기에 장시가 발달하면서 보부상이 생겨났다. 가볍고 귀중한 물건을 파는 봇짐장수와 무거운 물건을 파는 등짐장수가 있었다.
보부상은 지역 간에 상품을 유통하고 정보를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맡았다. 1866년, 병인양요 때 대원군이 각 군현에 상담조직인 보부청을 설치하면서 보부상은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어과전 천금록魚果廛千金錄(1834)
1834년부터 1912년까지 작성된 어과전魚果廛(부상조직負商組織)의 운영규칙과 임원명단을 기록한 책이다. 진주상인 관련 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834년부터 진주지역 어과전을 담당한 부상조직의 임원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진주지역의 보부상도 19세기 중반에 조직을 갖추고 활동했다. 1834년 보부상의 임원 명단과 1876년 연회 개최 내용이 기록된 문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조직이 활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868년에는 사천현, 단성현의 장터에도 지부를 둘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다.

혜상공국 우사 경상우 도반수惠商公局右社慶尙右都班首(1883)

개항 이후 상업의 자유화에 밀려 위협을 받게 된 보부상을 보호하기 위해 1883년
설립한 혜상공국의 경상우도 도반수 도장

조선 상인들은 1876년 개항 이후 외세 상권의 급격한 세력 확장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정부는 기존의 보부상 조직을 통합해 1883년 혜상공국을 만들어 지원했다. 이후 ‘상리국’·‘황국협회’ 등 몇 차례의 조직 개편을 거쳐 1899년 ‘상무사’로 변모했다.

사전 청금록四廛靑襟錄(1884~1938)

1884년 당시 진주 읍내 장터는 객사 앞에서 진주성의 신북문(현 중앙광장 사거리)으로 오는 대로에 위치해 있었으며, 사전은 베를 취급하는 포전, 물고기와 과일을 취급하는 어과전, 비단을 취급하는 금전, 종이를 취급하는 지전으로 구성되었다.
1887년에는 상인들의 회의소인 회당을 설립해 진주를 비롯한 7개 읍 보부상들은 시장세 질서를 바로잡은 경상우병사 한규설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1887년 회당 설립 당시, 진주 상인들의 긍지가 드러나 보이는 글을 소개한다.

우리 진주는 영남의 성대한 장관으로
경치가 아름다운 경상우도의 명승지다.
천리를 뻗은 산맥 아래 하나의 큰 성이 이름난 고장을 이루었다.
물산이 풍부하고 번화하여 보배로운 비단
눈부신 진주를 매매하는 곳이니 조나라의 한단이요,
땅이 기름지고 물고기소금을 판매하여
곡식을 바꾸어 얻을 수 있는 지방이니 옛 제나라의 낭야요,
예의가 바르고 의리가 곧은 것은
선성이 가르친 바를 후생이 사모한 것이니
바로 추로지향이다.

<우도소 창설 초기 서문> 중에서, 1887년

일제강점기, 진주 상인의 결집과 저항
상무사의 변천과 재건

1905년경 일본의 경제적 침탈이 본격화되자, 조선인 중심의 상인 조직인 상무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왕성했던 지역 상인 조직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진주의 상인 조직은 총독부의 통제 속에서 상인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는 자발적인 조직으로 변모했다. 1910년 전후에 결성되어 유지되던 상무 조합은 1917년경 새로 재건된 상무사 조직에 통합되어 상인의 경제적 이권 보호에 힘썼다.

1935년에는 시장세를 내리는 운동을 벌인 일이 주목된다. 시장 정리 사업 이후 진주읍에서 점포료를 2~3배 이상 인상하고 부당한 요구를 내세우자, 진주 상인들은 이를 거부하는 한편, 위생 시설 설립 등의 요구사항을 개진하고 단합하여 진정운동과 철시투쟁을 펼치려 했다.

#구인회 상점 터 사진
LG그룹 구인회 창업 회장이 자본금 3800원을 가지고     
청년창업가로서 첫발을 내딛은 구인회 포목상점이 있던 곳.           

1937년에 정상진, 문장현, 강선호, 구인회(구 락희화학, 현 LG그룹 창업주) 등 지역 상공인들은 의연금을 모아 홍수로 무너진 상무사 건물의 재건을 주도했다. 재건된 상무사 건물은 지역 상인의 뜻을 모으는 구심점이 되어 상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현판 <희사방명 喜捨芳名(1938)>
희사방명喜捨芳名은 1938년 상무사 건물의 중건 당시 의연금을 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 현판이다.

희사방명에 기록된 구인회 具仁會
(구 락희화학, 현 LG그룹 창업주) 기부금 내역

상무사는 국가의 지원 아래 전국적으로 조직됐지만, 상무사 사옥이 남아 있는 곳은 진주가 유일하다. 이 건물은 전통 목조 기와집으로, 당시 건축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과거 진주상무사의 모습
진주상무사는 전통목조 기와집으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상무사 건물이다.

현재 진주상무사의 모습

진주상무사를 통해 사전청금록을 비롯한 경제 활동 문서와 인장, 현판, 영수증, 건축 도면 등 귀중한 자료들이 잘 보존된 덕분에 19세기 중반부터 현대까지 진주지역의 상업 발달과 상인 활동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